선(禪)의 논리

선(禪)의 논리

근와(槿瓦) 2016. 8. 15. 01:51

선(禪)의 논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인간은 본래로 찬란한 불성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망각하고 미혹한 세계를 환작하여 그 속에서 아우성치며 생사고락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은 여기서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의 문인 자기의 본분을 자각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므로써 미혹과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의 주체적 주인공이며 만법의 근원자로서의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첫째는, 중생의 세계란 그 근원이, 자기본분을 착각한 망념(妄念)에 있는 것이며 미혹된 망념이 분주히 일어나서 끊임없이 중생세계가 상속하는 것일진대 번뇌 망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째 방법이라 하겠다. 어떻게 벗어난다는 말인가.


번뇌는 벗어나려 하여도 번뇌요, 이것이 번뇌다 하고 인정하는 것도 번뇌다. 번뇌를 끊었다는 것도 번뇌이고, 번뇌가 아주 없다는 것도 번뇌다. 원래로 번뇌란 없는 것이지만 범부의 번뇌로서는 번뇌를 벗어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선의 제1의 방법이 나온다. 그것은 앞서 대원선사의 오도에서 보는 것처럼 일체 생각을 모두 쉬는 것이다. 쉬는 생각도 쉬는 것이다. 번뇌가 분분히 일어서 중생세계가 분분하다면 번뇌를 쉬므로써 중생고에서 벗어난다는 논리이다. 대원선사도 그렇게 해서 자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누구나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혀라(若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라고 하였다.


또 묵조선(黙照禪)을 제창했던 천동정각(天童正覺)선사도 묵조명(黙照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묵묵히 말을 잊으니 밝고 밝게 드러나누나. 비추어 보니 분명하고 체성이 말끔해라. 말끔하여 홀로 비추니 비춤이 또한 다시 묘하다(黙黙忘言 昭昭現前 鑒時郭爾 體處靈然 靈然獨照 照中還妙)」


망념(妄念)의 구름이 부질없이 일어서 푸른 자기 성품의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더니 묵묵히 망념을 잊어 자기 본분을 비추니 원래로 밝은 푸른하늘이 훤출히 드러났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반야묘지(般若妙智)의 활용이다.


대개 중생이 원래로 청정법신인데 미혹(迷惑)하여 범부가 됐다고 하였다. 도대체 범부의 결정적 계기인 미혹이란 무엇일까. 미혹은 착각이 아닌가. 착각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휘둘린 생각대로 보고 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 미혹 중생에게 미혹의 눈을 돌리게 하는 방법으로 미혹이 없는 밝은 태양을 그 눈 안에 들여대는 것이다. 중생이 본래로 불성이며 설사 미혹하여 중생이 됐다고 하여도 불성에는 조금도 손감이 없는 것이다. 이 중생 눈앞에 자성본분을 정면 들여댈 때 거기서 확연히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고래로 많은 조사들에 의하여 행하여 왔다.


여기 그 한 예를 보기로 하자.


六祖 혜능(惠能)대사의 법을 이은 도명(道明)선사의 경우다. 혜능대사가 오조의 법을 이어받자 의발을 뺏으려고 맨 먼저 달려온 四품장군 출신인 바로 그 사람이다.


혜능의 법력 앞에 잘못을 뉘우치고 무릎을 꿇고 법을 물었다.

「행자시여, 나를 위하여 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하여 왔다 하니 이제 모든 인연을 다 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마라. 내 너를 위하여 말해주리라.」하고 한참 있다가 또 말하였다.「옳은 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른 것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떠한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하고 들여댔다. 도명은 이 말 아래 대오(大悟)하였다.


다시 방(龐)거사의 경우를 보자. 방거사가 마조(馬祖)선사에게 물었다.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서강의 물을 한입에 마시는 것을 보아 일러주마.」방거사는 이말 아래 곧 깨달았다. 또 한 예를 보기로 하자.


부처님께서 멸도에 드신 뒤 부처님의 법을 이은 가섭존자에게 아난존자가 물었다.

「세존께서 존자에게 전하신 것이 가사(袈裟)와 발우(鉢)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가섭존자는 부처님에게서 법을 전해받은 신표로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가사와 발우가 아닌 법 자체를 묻고 있다.


가섭존자는 대답하였다.

「문 앞의 찰간(刹竿)대를 넘어뜨려라.」아난존자는 가섭존자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다. 七일간을 궁구한 끝에 마침내 대오하였다.


위의 오도경위를 볼 때 조사들은 모두가 말이 아닌 말을 공부인에게 들여댄다. 그것은 바로 범부의 가슴에 들여댄 법의 창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단번에 깨치고 혹자는 七일간을 궁구하다가 마침내 깨치고 있다. 조사들은 진실한 본분(本分) 일착자(一著子)만을 쓸 뿐 다시 방편이 없다. 진실만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혹의 가슴 속에 잠긴 불멸의 빛을 찍어낸다.


이래서 선을 가리켜「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는 까닭이 있다.


위에 말한 바를 정리해보면 선의 방법이 둘이 있다. 하나는 묵조선(黙照禪)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간화선(看話禪)이다. 묵조선은 모든 생각을 다 놓고 잠잠하고 또렷하게 자성을 비추는 방법이다. 그것은 고요히 앉아서 옳든 그르든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온갖 생각을 단번에 놓아버려 오직 고요하고 말끔하게 마음을 지어가는 것을 요긴으로 삼는다.


둘째의 간화선은 화두를 간(看)하는 공부방법이다. 화두는 다른 장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조의 언구를 한결같이 보아가는 방법이다. 선관책진에 보이는 조사의 말씀은 모두가 화두를 가져 참선하는 방법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하에 고담(古潭)선사의 법어 일단을 인용하여 간화선의 방법을 엿보고자 한다.

「만약 참선하고자 할진대 여러 말할 것이 없다.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생각생각에 끊이지 않게 하여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한결같이 하고 항상 눈 앞에 대한 듯이 하라. 금강같이 굳은 뜻을 발하여 일념이 만년이게 하여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추어보아 살피고 다시 살펴야 하느니라. 혹 혼침이나 산란심이 일거든 힘을 다하여 채찍을 더하라. 천 번 갈고 만 번 단련하여 더욱 신선을 더할 것이며 일구월심 지어가면 공부가 빈틈없이 이어가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것이 마치 흐르는 샘물과 같을 것이며 마음이 비고 경계가 고요하여 즐겁고 편안하리라. 선악(善惡)간에 마장이 오더라도 무서워 하지도 말고 즐거워 하지도 마라. 마음에 증애심이 있으면 바른 것을 잃고 삿된 것에 떨어지게 되리라.


뜻을 태산같이 굳게 세우고 마음을 바다같이 넓게 하면 큰 지혜가 태양과 같이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추리라.


迷한 구름이 흩어져 버리면 끝없는 푸른 하늘에 한가위 보름달이 맑게 사무쳐 근원까지 밝을 것이다. 허공에서 불꽃이 튀고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홀연히 죽착합착하여 깊은 도리를 깨치리니 이때는 여러 조사의 공안(公案)을 한 꽂이로 모두 꿰어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문에 두루 밝지 아니함이 없게 되리라.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속히 선지식을 찾아가 기미(機味)를 완전히 하여 바름도 없고 치우침도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눈밝은 종사가 너의 깨친 바를 허락하시거든 다시 깊은 곳에 묻혀 살되 인연따라 고락을 받아가며 함이 없고 걸림없이 하여 성품을 흰 연꽃같이 할지니라. 때가 오거든 산에서 나와 밑빠진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묘를 이루어 널리 인간과 천상을 제도하여 다 함께 피안에 이르러 깨달음을 이루도록 할지니라.」



출전 : 이것이 선의 길이다(광덕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