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佛陀)

불타의 인식론

근와(槿瓦) 2015. 12. 20. 00:52

불타의 인식론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상응부경전의 제 4편을 처음으로 하여 4백, 6처품(六處品)이라고 하는 제목이 붙은 경전군을 찾아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6처상응(六處相應)의 2백 7경을 처음으로 하여 4백에 가까운 경이 집록되어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식론을 설한 내용이다.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융합하는 문제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감관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인식론인 것이다.

 

그런데 불타가 이 문제를 다룬 것은 획기적인 일이며 당시로서는 대단히 구체적인 사실이다.

 

먼저 인간의 감관을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을 6근(六根)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眼)은 눈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며, 이(耳)는 귀의 작용을, 비(鼻)는 코의 작용을, 설(舌)은 혀의 작용을, 그리고 신체(身體)의 감촉(感觸)을 신(身)이라고 칭(稱)하였다. 그리고 마음의 작용을 의(意)라고 지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에도 그것에 상응하여 눈에 대하여는 색(色), 말하자면 물질을 말하는 것이며, 귀에 대하여는 소리를 말하고, 코에 대하여는 향(香)을 말하고, 혀에 대하여는 맛을 말하고, 신체의 감촉에 대하여는 촉(觸)을 가리키고 있다. 말하자면 감촉(感觸)을 말하며 최후에는 의식의 대상으로 법(法)이라고 하는 말로써 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상의 내용의식을 가리킨 것으로 그 여섯 개의 감각과 그 대상이 그 경전군의 제목으로 되어 있는 6처(六處)인 것이다.

 

여러가지의 감관과 그 대상은 누구든지 알고 있는 것이며, 그 의미에 있어서도 소박하고 구체적이며 일견(一見) 사상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그 감관과 그 대상의 맺어짐을 말하고 있는 불타의 소박한 인식론 속에도 어떤 사상적인 문제가 엿보이기는 하나 이것이다 하고 선뜻 끄집어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여기에서 이 문제를 논해 보기로 한다.

 

먼저 말한 6처상응의 제 23에 일체(一切)라는 제목이 있다.

그 경은 예를 들어서 말한 사위성(舍衛城)의 설법이며, 그 교외에는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어 불타는 자주 이곳에 들려서 법(法)을 설하였다. 그것을 기원정사의 설법이라고 한다. 그날도 불타는 전례와 같이 비구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설법을 하기 시작하였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일체(一切)를 말하고자 하니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일체(一切)인가?"

 

여기에서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은 파리어로 샷파라고 해석하는 말이며, 샷파는 도대체가 무엇이 있느냐고 하는 말이다.

 

불타는 무엇을 일체(一切)라고 하는가 그 과제를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해 나가고 있다.

 

그 해답은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안(眼)은 색(色)이며, 이(耳)는 성(聲)이며, 비(鼻)는 향(香)이며, 설(舌)은 미(味)이며, 신(身)은 촉(觸)이며, 의(意)는 법(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眼)과 색(色)과 이(耳)와 성(聲), 여섯가지를 짝 지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근(六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六境))과 짝지은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따르는 각각의 감관과 그것에 대응하는 대상과 짝지어서 말한 것을 좀 더 별도로 말한다면 6근(六根)을 가지고 표시한 주관과 6처(六處)라고 말한 객관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인식을 일체(一切)라고 결론짓고 있으며, 그 결론이 의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불타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사람들은 이 일체(一切)를 버리고 타의 일체(一切)를 알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언설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은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 언설의 주장은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가면 답이 궁하여지며, 또한 그런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자기를 실다웁지 않는 세계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불타는 6근(六根)의 외적인 것에 집착하여 인간들이 허구의 것에 골몰하다가 마침내 난경에 빠진다고 설하고 있다.

 

이 경을 읽고 있으면 무슨 일로 불타는 이러한 것을 설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설하고 있는 불타의 진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현재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이것은 지금의 현실주의와 초현실주의자들의 논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도 무시할 수는 없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타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어떤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은 더욱 아니다.

 

6근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객관적 사물을 인식하는 여섯 가지 근본으로서 대경(對境)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란 말이다. 즉, 안근(眼根) · 이근(耳根) · 비근(鼻根) · 설근(舌根) · 신근(身根) · 의근(意根)으로서 곧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또 맛보고, 감촉을 가지는 이들 모든 것을 의근(意根)으로써 통괄하는 인식의 주체를 일러서 6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6근이라 할 때는 통상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육경(六處, 또는 六塵이라고도 함)이란 설명된 바와 같이 6근의 대경(對境)인 색경(色境) · 성경(聲境) · 향경(香境) · 미경(味境) · 촉경(觸境) · 법경(法境)을 말한다.

 

즉 빛깔은 눈의 대상이요, 소리는 귀의 대상이요, 향기는 코의 대상이요, 맛은 혀의 대상이요, 감촉은 몸의 대상이며, 그리고 이들에 대한 인식작용은 바로 마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육식(六識)이란 삼라만상의 객관적 대상을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으로 할 때 이 대상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하는 등의 인식작용, 곧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 의 여섯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단순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세하고 미묘한 인식작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확실히 이해할 때,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취사 선택의 움직임, 그리고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 하는 미묘한 심식(心識)의 작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식의 작용, 즉 인식의 주체적 작용과 이에 대한 객체적 대상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인식작용과 마음과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식의 주체적 실체인 6근이 의근(意根)의 대상인 법경(法境)을 인식하는 것을 가리켜 '마음'이라 말하고 있지만, 이때의 마음이란 청정한 마음, 즉 기신론(起信論) 같은 데서 말하는 일심(一心)의 그 마음은 아니다. 다만 완전히 깨끗한, 오염(汚染)되지 않고 더러움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 여섯 가지 인식의 주체로 인해서 그것의 외경(外境)인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끝없는 번뇌와 망상을 야기시키고, 또 그 인식작용은 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기록되어 일체의 선악업(善惡業)이 기록된다. 이것이 제 6식인 의식작용(意識作用)을 통해서 제 7말나식(末那識)을 거쳐 제 8아뢰야식(阿賴耶識)에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선악업(善惡業)을 간직한다는 뜻에서 제 8식을 무몰식(無沒識) 또는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성품(佛性)이다, 또는 청정한 일심(一心)이다'라고 말하는 등의 것들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이 6근과 6진, 그리고 6식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대체로 이를 유식학(唯識學) 계통에서는 삼라만상은 모두 아뢰야식으로부터 변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삼라만상이 유식소변(唯識所變 : 인식하기에 앞서 변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체로 법상종(法相宗) 계통에서 주장하는 뢰야연기(賴耶緣起)의 학설로서 삼라만상은 아뢰야식으로 연기(緣起)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의 종자, 또는 선악의 업(業)을 동시에 다 간직하고 있는 아뢰야식은 이 곳에서 말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있어 필연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불성이나 일심 역시 함장식(含藏識)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렇다면 대체 선악이 같이 있는 아뢰야식으로써 불교는 어떻게 인간 성불(人間成佛)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하여는 부처와 범부의 관계, 전체와 하나의 관계, 그리고 한 티끌 속에서 세계를 보고, 또한 한 티끌을 떠나서 세계란 따로 없다고 보는 화엄(華嚴)의 세계와도 연관된다. 범부를 떠나서 부처가 없듯이, 번뇌를 떠나서 깨침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범부 그 스스로가 바로 부처의 씨앗이요, 번뇌 그 자체가 바로 깨침의 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땅인 예토를 떠나서 정토(淨土)가 따로 없고, 번뇌 망상의 근본인 육근(六根)을 떠나서 육신통(六神通)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새로운 빛을 회복하는 것이며 또한 무한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와 망상의 근본인 이 6근을 잘 요리함으로써 참다운 인생관, 참다운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게 불교의 입장이다.

 

아함경의 제경(諸經)을 살펴보면 불타의 제자들이나 귀의자들은 불타의 가르침이 너무도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경에서 불타의 교시를 받은 후에 그러한 인상을 말한 것이 술회되어 있어 그 한가지의 예를 들고자 한다.

 

"훌륭한 대덕, 훌륭한 대덕,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복면을 쓴 사람의 복면을 벗기고, 미(迷)한 사람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암흑의 어둠속에 등화를 밝히고, 눈 있는 사람은 보라."

 

세존은 이와 같은 여러가지의 방편을 가지고 법(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존에 귀의하고, 또 교법에 귀의하고, 그 교법의 교단에 귀의하겠습니다."

 

이것은 아함경의 제경(諸經)에 여러 번 반복되는 유형화된 서술이며, 이것은 그들의 불타의 교시에 대한 하나의 대표적인 인상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술회 속에서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키고 복면한 사람의 복면을 벗겨 버리고 하는 등으로 불타의 인상을 여러가지의 비유로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도 최후의 암흑의 어둠속에 등화를 밝히고, 눈있는 사람은 보라고 한 1구(一句)는 불타사상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둠 속에 빛을 가지고 와서 보이시며, 눈있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보아라' 하신 그 비유는 불교의 오랜 역사속에 남아 있으며, 지금도 이 땅에 많은 영향을 남기고 밝게 비치고 있다.

 

 

출전 : 불타의 아함사상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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