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념(妄念)을 쉬게하는 방법

진심이 망념을 쉬게 함(眞心息妄)

근와(槿瓦) 2015. 12. 11. 19:30

진심이 망념을 쉬게 함(眞心息妄)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질문) 진심이 망념 속에 있으면 범부인데, 어떻게 해야 망념에서 벗어나 성인을 이룰 수 있겠는가?

(대답) 옛사람이 이르기를 '망심(妄心)이 없는 곳이 곧 보리(菩提)이므로,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고 하였다.

 

또 경에 말하였다.

'중생들의 허깨비 같은 몸(幻身)이 멸하므로 허깨비 같은 마음(幻心)도 멸하고, 허깨비 같은 마음이 멸하므로 허깨비 같은 대상(幻塵)도 멸하고, 허깨비 같은 대상이 멸하므로 허깨비 같은 멸()도 멸하고, 허깨비 같은 멸이 멸하기 때문에 허깨비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만들기 위해 연마할 때 얼룩이 없어지면 밝은 빛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영가(永嘉) 스님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은 감관()이고 법은 대상()이다. 이 둘은 마치 거울의 얼룩과 같다. 얼룩이 없어지면 밝은 빛이 드러나고, 마음과 법을 함께 잊으면 성()이 곧 참()이다.' 이것이 망념에서 벗어나 참을 이루는 것이다.

 

(질문)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뜨겁기가 타는 불이고 차겁기는 얼음덩이이며, 빠르기는 수그리고 쳐다보는 동안에 두번 사해(四海) 밖을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을 때는 깊고 고요하며, 움직일 때는 하늘 끝까지 멀리 가니,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장자가 범부의 마음은 이와 같이 다스리기 어려움을 말한 것인데, 종문(宗門)에서는 어떤 법으로 망심을 다스리는가?

(대답) 무심(無心)으로 망심을 다스린다.

 

(질문)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면 초목과 다를 것이 없는데 무심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대답) 지금 말한 무심은 마음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마음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마치 빈 병이라고 할 때 병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한 것이지 병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무심하다면, 자연히 비면서 신령하고 고요하면서 오묘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참뜻이다.

 

이 말에 따르면, 망심이 없다는 것이지 진심의 오묘한 작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스님들이 무심 공부를 한 것이 저마다 다르다. 이제 그 대의를 들어 대략 열 가지로 밝히고자 한다.

 

첫째는 깨달아 살핌(覺察)이다.

공부할 때 항상 생각을 끊어 생각이 일어남을 막는다. 한 생각이 일어나려고 하면 즉시 그것을 깨달아 부순다. 망념을 부수어 깨달으면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깨달은 지혜도 쓸 필요가 없다. 망념과 깨달음을 함께 잊어버림을 무심이라 한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달음이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또 게송으로 말하였다.

 

진심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오로지 그 견해를 쉬어라.

이것이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둘째는 쉼(休歇)이다.

공부할 때는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아니하여, 마음이 일어나면 곧 쉬고 인연을 만나면 곧 쉰다. 옛사람이 말하였다.

'한 가닥 흰 비단처럼 해가며, 차거운 땅처럼 해가며, 옛 사당 안의 향로처럼 해가서, 바로 세세한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바보와 같고 말뚝과 같아야 비로소 조금 서로 통함이 있다.'

이것이 쉬고 쉬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둠(泯心存境)이다.

공부할 때 모든 망념을 죄다 쉬어 바깥 경계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쉰다. 망심만 쉬어버리면 어떤 환경이든 무슨 해가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한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곳에 아름다운 풀은 있는데 성안에 친구가 없네'라고 하였다.

또 방거사(龐居士)는 말하기를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은들 무슨 상관이 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두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넷째는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둠(泯境存心)이다.

공부할 때 안팎의 모든 경계가 모두 공적(空寂)하다고 관하고, 한 마음만 남겨 외로이 뛰어나고 홀로 선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법과 함께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함께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음이 경계에 집착하면 그 마음이 곧 망념이니, 이제 경계가 이미 없는데 무슨 망념이 따로 있겠는가.

진심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거리끼지 않으니, 옛사람이 말한 '경계만을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동산에 꽃은 이미 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

'삼천 검객(劒客)은 지금 어디 있는고, 장주(莊周)가 홀로 태평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다섯째는 마음도 없애고 경계도 없앰(泯心泯境)이다.

공부할 때 먼저 바깥 경계를 텅 비워 고요하게 하고 다음으로 안에 있는 마음을 없앤다. 이미 안팎의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고요한데 망념이 무엇을 의지해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관계(灌溪)스님도 말하였다.

'시방(十方)에 벽이 없고 사면에 문도 없어 훨훨 벗은듯하고 물을 뿌린 듯 맑다.'

이것이 조사의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말이 있다.

 

'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적적하게 온 천지가 비었구나.'

'사람도 소도 모두 볼 수 없으니 바로 달이 밝은 때로구나.'

이것이 마음도 없애고 경계도 없애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여섯째는 마음도 두고 경계도 둠(存心存境)이다.

공부할 때 마음은 마음의 자리에 머무르고 경계는 경계의 자리에 머물러, 때로는 마음과 경계가 서로 맞서더라도 마음은 경계를 취하지 않고 경계는 마음에 오지 않는다. 각기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 저절로 망념이 생기지 않아 도에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상()이 항상 머문다'고 했으니, 조사의 '사람과 경계를 다같이 빼앗지 않는'법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한 조각 달이 바다에서 떠오르니

몇집 사람이나 다락에 오르는고.'

'산의 꽃 천만 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르네.'

이것은 경계도 두고 마음도 두어 망념을 없애는 공부다.

 

일곱째는 안팎이 전체(內外全體)이다.

공부할 때 산하 대지와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안의 몸과 바깥 세상 등 모든 법이 똑같이 진심의 실체이므로 고요히 텅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다.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한 덩어리로 두드려 만든 것이니, 다시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승조(僧肇)법사도 말하였다.

 

'천지와 나는 같은 뿌리요

만물이 나와 같은 몸이다.'

이것이 안과 밖 전체로 망념을 없애는 공부다.

 

여덟째는 안팎이 모두 작용(內外全用)이다.

공부할 때 모든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법과 일체 행동과 베품을 다 진심의 오묘한 작용으로 관한다. 온갖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곧 오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니 모두가 그 오묘한 작용인데 망심이 어느 곳에 발붙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영가(永嘉) 스님은 말하였다.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고, 허깨비와 같은 빈 몸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지공(誌公)<십이시가(十二時歌)>에는 이렇게 말했다.

'새벽 인시(寅時), 미친 기틀(狂氣)안에 도인의 몸이 숨었으니,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 줄 알지 못하고 저렇듯 허덕이며 고생만 하는가.'

이것이 안팎의 전체 작용으로 망념을 쉬는 공부다.

 

아홉째는 체가 곧 용(卽體卽用)이다.

공부할 때 참 실체에 계합하여 한결같이 공적(空寂)하지만, 그 가운데 안으로 신령스런 밝음이 숨어 있으니 체가 곧 용이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였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함은 옳고, 성성하지만 망상이 있으면 그르다. 적적하면서도 성성하면 옳고, 적적해서 무기(無記 : 흐리멍덩한 상태)에 떨어진 것은 그르다.'

이미 적적한 가운데 무기를 용납하지 않고, 성성한 가운데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망심인들 생길 수 있겠는가.

이것이 체가 곧 용으로서 망념을 없애는 공부다.

 

열째는 체와 용에서 뛰어남(透出體用)이다.

공부할 때 안과 밖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는다. 사방 팔면을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만들어 원만한 자리에서 체와 용을 나누지 않는다.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몸을 한 덩이로 쳐서 만드는데 망념이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였다.

'온몸에 꿰맨 자리가 없어 위 아래가 아주 둥글다.'

이것이 체와 용을 뛰어남으로써 망념을 없애는 공부다.

 

이상 열 가지 공부하는 방법은 전부 쓸 것이 아니고 한 문만을 가리어 공부를 성취하면, 망념은 저절로 사라지고 진심이 곧 나타날 것이다. 그 근기를 따라 숙세에 익힌 것이 어떤 방법에 인연이 있는지 곧 닦아 익히게 되면, 그 공부는 공()이 없는 공이므로 마음있는 공력(功力)이 아니다. 이 망심을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기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이니, 글이 번거롭다고 탓하지 말라.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眞心直說, 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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