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복의 힘

근와(槿瓦) 2015. 11. 22. 19:59

복의 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참 이상한 의자도 다 있다. 그 의자에 앉기만 하면 스르르 잠이 든다. 책을 읽기 위해서거나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그 의자에 기대어 앉으면 번번이 잠에 빠진다. 팔걸이가 있는 등나무 회전의자인데 잠귀신이라도 붙어 있는지 앉기만 하면 10분도 안되어 잠이 오는 것이다. 잠을 못 자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의자에 한번 앉아 보도록 권하고 싶다.

 

어떤 절에 있는 의자인데, 알아보았더니 그전에 살던 한 잠보 스님이 그 의자에 앉아 잠만 잤다고 했다. 전화가 왔으니 받으라고 소리소리 질러도 전혀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면 그때마다 그는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마 잠귀신이 붙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잠을 못 이루어 병이 된 사람도 있지만 잠이 너무 많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는 한 생애의 3분의 1을 잠으로 흘려 보낸다. 60년이 한 생애라면 20년을 순전히 잠으로 보내는 것. 그것도 모자라 기회만 있으면 더 잠을 자려고 하는 나쁜 버릇을 익히는 수가 있다.

 

세상에서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자지 않고 깨어서 일한 사람들이다. 잠도 일종의 습관이다. 대개 게으른 사람들은 잠자리에서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있다.

 

정진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큰 장애가 있는데 잠과 망상이 그것이다. 좀 조용히 앉을 만하면 어느새 졸음이 오고, 맑은 정신으로 또렷또렷할 만하면 또 망상이 떠오른다. 그래서 졸음을 수마(睡魔 : 잠귀신)라고 한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였다. 아니룻다(阿那律)라는 한 제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석가족 출신으로 부처님의 사촌 동생뻘 되는 사람. 설법이 끝난 뒤 부처님은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그 내용은 <증일아함(增一阿含)> 역품(力品)에 실려 있다.

 

“아니룻다야,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수행자가 되었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서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의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이때 아니룻다는 자기 허물을 크게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오늘 이후로 저는 비록 몸이 부서지고 손발이 닳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새벽이 와도 잠들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지나치게 몸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다. 게으름은 경계해야 하지만 몸을 괴롭히는 것도 피해야 한다.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극단적인 행위를 피하고 가장 온전한 길을 가라는 것이 부처님의 근원적인 설법정신이다.

 

그러나 아니룻다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저는 이미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 맹세를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고 부처님은 의사 지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하셨다. 환자의 증상을 진찰해 본 지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환자가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쉬어야 치료할 수 있을텐데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부지할 수 없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고,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외부의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실명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지혜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 ‘천안(天眼) 제일’이라고 불렀다.

 

마음의 눈은 열렸다고 하지만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였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고 하였지만 제대로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누구든지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꿰주었으면 좋겠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준 사람이 있었다. 그분이 다른 사람이 아닌 부처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야,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룻다로서는 부처님의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존께서는 이미 미혹(迷惑)의 바다를 건너셨고 애착의 늪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복을 더 지어야 한다고 하십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보시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할 것이 없다. 인욕에는 여기까지라고 할 한계가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도 끝이라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설법과 중생제도와 복 짓는 일도 그 한계가 없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있으면 일상의 우리들 자신은 너무도 보잘것이 없어 부끄럽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나 ‘이웃의 도리’를 가지고도 우쭐거리거나 생색을 내려고 한다. 조그마한 공덕을 가지고 그 몇곱을 드러내 놓으려고 한다. 또 복을 받으려고만 하지 지으려는 일에는 소홀하다.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넜는데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느냐는 아니룻다의 물음에 부처님은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중생들이 악의 근원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중생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런 게송을 읊으신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힘 중에서

복의 힘이 가장 으뜸이다

천상이나 인간에 이보다 나은 것 없으니

불도도 이 복의 힘으로 이룬다.

 

불자들이 늘 외고 있는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 가운데 첫째 서원인 ‘끝없는 중생을 다 건지리이다’가 바로 이 염원이다. 이미 미혹의 바다를 건너 다시 더 구할 것이 없을 것 같은 부처님도 박복한 중생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慈悲)란 기쁨을 나누어주고 슬픔을 거두어준다는 뜻. 좋은 일에는 함께 기뻐하고 괴롭거나 슬픈 일에는 함께 신음하는 것이다. 친구가 좋은 일을 맞이했는 데도 함께 기뻐할 줄 모르고, 슬픔을 보고도 덜어주지 않는다면 그를 친구라고 할 수 없다. 시기나 질투심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중생심이다. 동정심은 곧 자비심, 그것은 불심이다. 한 마음이 옹졸하면 중생이 되고, 한 마음이 열리어 너그러우면 부처와 보살이 된다.

 

우리들 자신의 존재 의미는 관계된 대상이나 그 세계를 통해 그때그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한 생각 콕 막힌 중생인지, 앞뒤가 활짝 열린 본래의 부처인지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은 복이 될 수 없다. 이웃에게도 덕이 되고 내 자신에게도 덕이 되는 행위가 마음 밭에 뿌려진 복이다. 이 마음 밭에 씨를 뿌려야 위없는 불도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들이 늘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뒷날 아니룻다는 파치나란 숲에 머물면서 선정(禪定)에 들어 이런 생각을 한다. <중아함 팔념경(八念經)>.

 

“이 진리는(즉 불도는) 욕심이 없는 데서 얻는 것이고 욕심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구나. 이 진리는 넉넉한 줄 아는 데서 얻는 것이고 넉넉한 줄 모르면 얻을 수 없다. 이 진리는 정진으로써 얻는 것이고 게으르면 얻을 수 없다. 이 진리는 군중을 멀리 떠남으로써 얻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번거로움 가운데서는 얻을 수 없다. 이 진리는 바른 생각으로 얻는 것이고 그릇된 생각으로는 얻을 수 없다. 이 진리는 고요 속에서 얻는 것이고 시끄러움 속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진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얻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얻을 수 없겠구나.”

 

이때 부처님은 아니룻다의 생각을 아시고 그의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착하다, 아니룻다야. 어느 큰 사람(大人)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있구나. 그 다음 한 가지는 부질없는 궤변을 늘어놓지 않음이다. 너는 이 큰 사람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수행하는 동안 욕심을 버리고 기쁨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마치 여인들이 고운 옷을 옷장에 가득 넣어두고 즐거워하듯이, 만족함을 느끼고 기쁨에 넘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열반의 길로 가는 너는 남루한 옷도 마음에 들 것이고, 빌어먹는 밥도 맛이 있을 것이며, 나무 밑 풀자리에 앉아도 마음은 늘 즐거울 것이다.”

 

그 ‘잠귀신’ 붙은 의자가 지금은 어디서 누구를 졸음으로 몰고 가는지...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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