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勝鬘經)

승만경(勝鬘經)

근와(槿瓦) 2015. 11. 16. 17:36

승만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제1장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때는 파사익왕과 말리부인이 불법(佛法)을 믿기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았을 때였다.

 

왕과 부인, 두 사람은 서로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 딸 승만은 총명하고 슬기로워 근기(根機)가 뛰어나고 명민(明敏)하여 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을 뵙는다면 반드시 불법을 깨달아 마음에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편지를 보내 승만을 불법에 귀의하게 함이 좋을 것입니다. 부인은 왕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고 말했다.

 

왕과 부인은 승만에게 주는 편지에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찬양하는 글을 간략히 써서 찬다라라는 궁녀를 보냈다. 궁녀 찬다라는 편지를 간직하고 아유타국에 도착하여 궁중으로 들어가 승만부인에게 공경히 편지를 전했다.

 

승만부인은 편지를 받고 환희하며 머리 위로 받들었다가 읽었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을 내어 찬다라를 향해 노래로 말하였다.

 

내 듣자하니 부처님의 음성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바,

편지 사연 같이 참으로 진실한 분이시니

마땅히 공양을 해야 하리.

우러러 생각컨대 부처님께서는

널리 세상을 위하여 나타나셨으니,

가련한 이 내 몸도 어여삐여겨

반드시 나를 만나주시리.

이와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부처님이 허공 중에 나타나시어

밝은 광명 널리 비추어

비할 바 없는 몸을 나타내 보이셨네.

승만부인과 그 권속들

머리를 발에 대고 예를 올리며

맑고 깨끗한 마음에 감동이 있어,

부처님의 참된 공덕 찬탄들 하네.

여래의 아름답고 귀하신 몸

세상에는 짝할 이 없어

비할 바 없이 불가사의함이여,

이 때문에 지금 공경히 예배합니다.

여래의 몸은 다함이 없고

지혜도 또한 그러하오니

일체의 온갖 법 항상 머물러

이 때문에 내 지금 귀의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악업도

몸으로 지은 네 가지 허물도

궁극까지 항복받았으니

내 지금 법왕께 귀의합니다.

일체의 경계를 모두 아시고

지혜의 몸은 자재로우시며

일체의 법을 모두 지니셨사오니

내 지금 공경히 예배합니다.

헤아릴 수 없음에 경례하오며

비유할 수 없음에 경례합니다.

가이없는 법문에 경례하오며

불가사의함에 경례합니다.

불쌍한 마음으로 저를 보호하여

법의 종자 자라게 하옵소서

금생에도 후생에도 원하옵니다.

부처님이 언제나 거두어 주시기를

내 이미 너를 편안케 하여

전세에 이미 깨달음을 얻게 했으며

이제 다시 너를 거둬 주노니

미래의 생에도 역시 그러하리라.

저는 이미 공덕을 지었으니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이같은 여러 선근으로

오직 원하옵나니 섭수하심을 보여 주소서.

 

이 때, 승만부인과 그의 모든 권속들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대중 가운데서 승만부인에게 이렇게 수기 하셨다.

"그대는 여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으니 이 공덕으로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에 마땅히 천상과 인간에서 자재로운 왕이 될 것이니라. 태어나는 곳 어디에서나 항상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내 앞에서 찬탄하기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마땅히 다시 한량없는 아승지(阿僧祗) 부처님을 공양하라. 2만 아승지겁을 지나 마땅히 보광여래(普光如來)·응·정변지(正遍知)라는 이름의 부처님이 될 것이니라. 그 부처님의 나라에는 갖가지 나쁜 일이나 늙고, 병들고, 쇠하고, 번거로운 일이나 뜻에 맞지 않는 고통이 없느니라. 또한 가지가지 악업의 이름도 없느니라.

 

그 나라의 중생들은 몸과 기운과 수명과 오욕이 모두 구족하고 모든 것이 즐거워 타화자재의 제천(諸天)보다도 나을 것이니라. 그 세계에는 깨끗하고 한결같은 대승의 모든 선근을 닦아 익힌 중생만이 그곳에 모일 것이니라. 승만부인이 수기를 받을 때에 수많은 중생과 모든 천과 사람들이 그 나라에 왕생하기를 기원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 다 마땅히 왕생할 것이라고 수기하셨다.

 

제2장 십대수장(十大受章)

이 때에 승만부인은 수기 주심을 듣고 공경히 서서 열 가지 서원을 발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받은 바 계에 대하여 범할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모든 어른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모든 중생에 대하여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의 모습이나 밖의 뭇 기구에 대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두루 모든 것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저 스스로를 위하여 재물을 모으지 않겠습니다. 무릇 받는 것이 있다면 모두 가난하고 곤궁한 중생들에게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 자신만을 위하여 사섭법을 행하지 않겠습니다. 애착하지 않는 마음과 만족함이 없는 마음과 거리낌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들을 거두어 교화하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만약 고독한 사람, 갇혀있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등 가지가지의 고통과 재난을 당하는 중생들을 본다면 마침내 잠시도 버리지 않고 반드시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의리로써 이익되게 하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뒤에야 떠나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만약 동물을 붙잡거나 학대하거나 하는 등의 모든 나쁜 짓과 갖가지 계를 어기는 사람을 보게 되면 끝내 그대로 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마땅히 항복받을 사람은 항복받고 거두어 들일 사람은 거두어 들이겠습니다. 항복받거나 거두어 들임으로써 진리가 영구히 머무르게 되고, 진리가 영구히 머무르게 되면 천상의 사람, 인간 세상의 사람들이 많아지고 악도가 줄어 들어 능히 여래가 굴리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따라 구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익이 있으므로 거두어 버리지 않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정법을 항상 몸에 지녀 끝내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그 까닭은 진리를 잊어버리는 것이 곧 대승을 잊는 것이요, 대승을 잊는 것은 바라밀다를 잊는 것이며 바라밀다를 잊는 것은 대승을 원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대승을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법(正法)을 거두어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즐거워함을 따라 들어가려 해도 영원히 범부의 자리로부터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와같이 한없이 큰 잘못을 보았고, 또 미래의 올바른 진리를 섭수할 보살마하살의 한량없는 복과 이익을 보는 까닭에 이 십대수를 받습니다."

 

"법왕 부처님이시여, 여기에서 저를 위해 증명해 주십시오. 오직 부처님만은 증명해 아실 것이오나 모든 중생들은 선근이 얕은 탓으로 혹은 의심을 일으키기도 할 것입니다. 이 십대수에 이르기는 극히 어려운 까닭에 저들이 혹시 기나긴 밤에 옳은 이익을 받지 못하여 안락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 지금 부처님 앞에서 참으로 진실한 서원을 말씀드리오니 제가 이 십대수를 받아서 말씀한 바와같이 실행하겠다는 이 서원으로 인하여 대중 속에 마땅히 하늘꽃이 비처럼 내리며 하늘의 미묘한 소리가 들리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말했을 때 허공 중에서 가지가지 하늘꽃이 비처럼 내리고 미묘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셨다.

"그렇도다, 그렇도다. 네가 말한 바와 같아서 진실로 다르지 않느니라."

 

저들이 하늘의 아름다운 꽃을 보고 미묘한 음성을 들어 갖가지 모든 의혹이 다 없어지고 한없이 기쁘게 뛰놀면서 언제나 승만부인과 더불어 만나고 행하는 바도 같기를 발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대중이 서원하는 바와 같이 모두 다 이루어지리라고 수기하셨다.

 

제3장 삼대원장(三大願章)

이 때에 승만부인은 다시금 부처님 앞에서 세가지 크나큰 원을 발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이 진실한 서원으로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는 중생들을 편안하고 안온하게 하려 합니다. 이 선근으로써 어느 세상이고 다시 날 적마다 정법의 지혜가 얻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제일대서원이라고 합니다.

 

제가 정법의 지혜를 얻은 후에는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연설하겠습니다. 이것을 제이대서원이라고 합니다.

 

제가 바른 진리를 거둬들이고는 몸과 목숨과 재산 등을 바쳐 정법을 보호하고 지켜 가겠습니다. 이것이 제삼대서원입니다."

 

이 때에 부처님게서 승만부인의 이 서원을 수기하셨다.

"삼대서원(三大誓願)은 일체의 모든 색(色)이 허공 중에 들어 있는 것과 같으니라. 즉 보살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원이 모두 다 이 세 가지 크나큰 서원 속에 들어 있어 이 삼대원은 진실로 넓고 큰 것이니라."

 

제4장 섭수정법장(攝受正法章)

이 때에 승만부인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금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다시 받들어 온갖 마구니를 항복받겠다는 큰 서원이 참으로 진실하여 틀림이 없음을 말하려 합니다."

 

부처님이 승만부인에게 말했다.

"너의 말을 들어보자."

 

승만부인은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보살이 간직한 바 항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모든 원도,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인다는 하나의 크나큰 서원에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서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승만부인을 칭찬하셨다.

"좋다, 좋다. 너의 지혜와 방편은 매우 깊고 미묘하구나. 너는 이미 기나긴 세월 동안 모든 선근을 심었구나. 미래세의 중생도 오래오래 선근의 씨를 뿌린 자라면 부인이 말하는 바를 능히 이해할 것이니라. 부인이 말하는 올바른 진리를 거둬들인다는 것은 모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며, 또한 장차 말씀할 것이니라. 나도 그 깨달음을 얻어 역시 이 섭수정법을 언제나 설하느니라. 이와같이 내가 섭수정법을 설하는 공덕이 그지없으니 여래의 지혜와 변재 또한 끝이 없느니라. 이 까닭은 섭수정법에 큰 공덕이 있고 크나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라."

 

승만부인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제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다시 섭수정법의 넓고도 큰 뜻을 연설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연설해 보아라."

 

승만부인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섭수정법의 뜻이 넓고 크다는 것은 곧 무량이니, 일체의 모든 불법을 얻어 8만4천의 법문을 포섭하는 까닭입니다. 마치 세계가 처음 이루어질 때 크나큰 구름이 일어나 많은 비와 갖가지 보배를 뿌리듯이,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은 한없는 복덕과 한량없는 공덕을 비오듯 뿌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또 세계가 처음으로 이루어질 때에 큰 물이 있어 삼천대천계장(三千大千界藏)과 4백억의 갖가지 세계에 뿌리듯이 올바른 진리를 거둬들임에도 대승의 무량계장(無量界藏)과 일체 보살의 신통력과 일체세간의 안락과 일체세간의 뜻과 같이 자재함과 출세간의 안락 등을 내는 것이며, 세계가 이루어짐과 천상과 인간에서 얻지 못한 바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나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대지가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 네 가지란 첫째 큰 바다, 둘째 모든 산, 셋째 초목, 넷째 중생을 말합니다. 이와같이 올바른 진리를 거둬들인 선남자, 선여인은 대지를 건립하여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합니다.

 

그 네 가지 책임이란 선지식을 여의고 진리가 아닌 것을 들은 중생들은 인·천(人·天)의 선근으로써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성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성문으로써, 연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연각으로써, 대승을 구하는 자에게는 대승으로써 각각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바른 진리를 거둬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의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함이라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와같이 바른 법을 거둬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이 대지를 건립하여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한다면 널리 중생들이 청하지 않아도 항상 도움을 주는 벗이 되어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로하고 불쌍히 여겨 세상에서 진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또 대지에는 네 가지의 보배광이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 둘째 값비싼 보배, 셋째 값이 적절한 보배, 넷째 값싼 보배를 말합니다. 이것을 대지의 네 가지 보배값이라고 이름합니다.

 

이와같이 섭수정법하는 선남자, 선여인이라면 대지를 건립하여 중생의 네 가지 가장 크고 훌륭한 보배를 얻는 것입니다. 그 네 가지 보배란 다음과 같습니다.

 

섭수정법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정법(正法)을 들은 바 없는 중생에게는 인천의 공덕과 선근으로써, 성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성문으로써, 연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연각으로써, 대승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대승으로서 각각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큰 보배를 얻은 중생들은 모두 섭수정법하는 선남자, 선여인에 의해서 기이하고 드문 공덕을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큰 보배광이란 곧 섭수정법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바른 법과 다르지 않고 섭수정법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른 법이란 곧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고, 바라밀은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으니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이란 곧 바라밀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이 마땅히 보시로써 성숙시킬 사람에게는 보시로써 성숙시키는데 몸과 팔·다리를 버리기까지 하면서 장차 저들의 뜻을 보호하여 성숙시키므로 그렇게 성숙한 중생이 올바른 진리를 거듭 섭수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이름합니다.

 

마땅히 계로써 성숙시킬 사람에게는 육근을 지키게 하여 몸으로 하는 행동과 말과 뜻으로 하는 것 등의 삼업을 깨끗이 하고, 나아가 앉거나 눕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네 가지 위의를 바르게 하여 저들의 뜻을 지켜 성숙시키면 그렇게 성숙한 중생은 올바른 진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지계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인욕으로써 성숙시킬 사람에게는 만약 저 중생이 꾸짖고 헐뜯고 욕하고 비방하며 위협하고 두렵게 하는 경우에도 화내지 않는 마음과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가장 크게 참는 힘으로써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그들의 뜻을 거두어 성숙시킵니다. 이렇게 하여 성숙된 중생은 올바른 진리를 세웁니다.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정진으로 성숙시킬 사람에게는 저 중생에게 게으르고 나태한 마음과 크나큰 욕심을 일으키지 않고 가장 훌륭한 정진과 심지어 행동으로 그들의 뜻을 보호하면서 성숙시킵니다. 이렇게 성숙된 중생은 올바른 진리를 세웁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선정으로 성숙시킬 사람에게는 저들 중생에게 산란하지 않는 마음과 외부의 세계로 향하지 않는 마음과 가장 올바른 생각과 심지어 오래 전에 한 일과 오래 전에 설한 법을 끝내 잊지 않고 저들의 마음을 보호하여 성숙시킵니다. 이렇게 성숙된 중생은 올바른 진리를 세웁니다. 이것을 선정바라밀이라고 이름합니다.

 

마땅히 지혜로 성숙시킬 사람에게는 저 모든 일체의 이치를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써 일체의 논의와 일체의 기교, 그리고 궁극적인 이치, 내지 갖가지 방편으로써 모든 일을 연설하여 저들의 뜻을 거두어 성숙시킵니다. 이렇게 하여 성숙된 성숙한 중생들은 올바른 진리를 세웁니다. 이것을 지혜바라밀이라고 이름합니다.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이시여, 바라밀과 섭수정법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이 곧 바라밀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다시 그 크나큰 뜻을 말하려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보아라."

 

승만부인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것과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사람은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고,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사람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이 곧 바로 법을 거두어들이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은 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세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하면 몸과 생명과 재산을 말합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몸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생사와 영원한 미래 세상 등에 있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여의고 부서짐이 없이 언제나 머물면서 변하지 않으며, 가히 생각하거나 논의하기 어려운 여래의 법신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생사와 영원한 미래 세상 등에 있어서 필경에는 생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가이없이 항상 머물며 불가사의한 공덕과 일체의 심오한 불법을 얻는 것입니다.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생사·영원한 미래 세상 등에 있어서 어떤 중생과도 함께 하지 않으며 줄거나 다함이 없고 필경에는 불가사의한 갖가지 공덕을 모두 다 얻는 것이며, 일체중생들의 뛰어난 공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처럼 세 가지를 버리는 선남자, 선여인이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여 언제나 일체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얻고 일체의 모든 중생들이 우러러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또한 선남자, 선여인이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진리가 없어지려 할 때에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 사부대중이 서로 당파를 형성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파괴하고 뿔뿔히 흩어져 가더라도 아첨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거짓된 짓을 하지 않음으로 올바른 진리를 즐거워하고,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여 진리의 벗이 됩니다. 진리의 벗이 되는 사람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을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은 이와같이 크나큰 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된 눈이시며 참다운 지혜이시며, 진리의 근본이 되시며 진리에 통달하시며, 올바른 진리에 의지하므로 또한 모두 아시고 보실 것입니다."

 

이 때에 부처님께서 승만부인이 말한 바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크나큰 정진력에 대하여 기쁜 마음을 일으키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승만이여, 그대가 설한 바와 같으니라.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크나큰 정진의 힘은 마치 힘센 장사가 몸을 조금만 건드려도 큰 고통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올바른 진리는 조금만 거두어들이더라도 마의 무리는 고통스러운 것이니라. 어떤 선법(善法)이라도 마의 무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과 다를 것이 없느니라.

 

또 우왕과도 같으니라. 우왕은 모양과 색깔이 매우 훌륭하여 일체의 다른 소에 비교가 안되듯이, 대승으로써 올바른 진리를 조금만 거두어들여도 일체 이승(二乘)들의 선근보다 매우 훌륭하여 넓고 큰 것과 같으니라.

 

또 마치 수미산이 어떤 산보다도 단정하고 엄숙하여 그 빼어남이 특별하듯이, 대승으로써 몸과 생명과 재산을 버리고 거두어들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은, 몸과 생명과 재산을 버리지 못하는 처음 대승에 머무는 사람의 일체선근보다 뛰어나느니라. 하물며 대승의 넓고 큰 선근을 이승의 선근에 비교하겠느냐.

 

승만이여,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중생들에게 열어 보이는 것이며,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며, 중생들을 성취시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승만이여,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은 이와같이 큰 이익이며, 이와같이 크나큰 복이며, 이와같이 큰 과보이니라.

 

승만이여, 내가 아승지겁을 통하여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이는 공덕과 이치와 이익을 설(說)한다고 해도 끝까지 다하지 못할 것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에는 가이없고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이니라."

 

제5장 일승장(一乘章)

부처님께서 승만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은 일체의 모든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임에 대하여 이제 다시 말해 보아라."

 

승만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좋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가르침을 받아 오직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승만부인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올바른 진리를 거두어들인다고 하는 것은 곧 마하연입니다. 왜냐하면 마하연, 즉 대승은 일체의 성문과 연각,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마치 아뇩달이라고 하는 커다란 못으로부터 여덟 줄기의 큰 강이 흘러 나오듯이, 마하연에서도 일체의 성문과 연각,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또 일체의 온갖 씨앗이 모두 대지를 의지하여 성장할 수 있듯이, 일체의 성문과 연각,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 또한 대승에 의지하여 자라남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이시여, 대승에 머물면서 대승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곧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과 일체세간·출세간의 선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육처(六處)를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 육처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곧 올바른 진리가 머무는 것. 올바른 진리가 멸하는것. 바라제목차·비니(比尼)·출가(出家)·구족계(具足戒)를 받는 것 등이 그것인데 대승을 위하여 이 육처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진리가 머문다는 것과 대승이 머문다는 것은 곧 올바른 진리가 머무는 것입니다. 올바른 진리가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과 대승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올바른 진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바라제목차와 비니의 두 가지는 뜻은 하나이면서 그 이름만이 다른 것입니다. 비니라고 하는 것은 곧 대승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을 의지하여 출가하고 또 구족계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대승의 위의인 제가 곧 비니이며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일이 없으니 아라한은 여래를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또 구족계를 받는 때문입니다."

 

"아라한은 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 아라한에게는 공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일체의 제행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생각에 머무는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장차 자기를 해치려드는 것과 같은 까닭에 아라한에게는 구경(究竟)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 까닭은 부처님에게 의지하고 의지할 데를 구하지 않는 때문입니다. 마치 중생들이 의지하는 바가 없으므로 가는 곳마다 공포가 있고, 공포 때문에 귀의할 곳을 구하는 것과 같이 아라한은 두려움이 있고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공포와 두려워함이 있습니다. 이 까닭에 아라한과 벽지불은 나머지 생겨나는 일을 다 하지 못했으므로 생겨남이 있습니다. 나머지 범행을 다 이룩하지 못했으므로 순수하지 못합니다. 일에 있어서도 구경까지 이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짓는 바가 있으며, 피아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끊어야 할 것이 있고, 끊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열반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래·응·정등각(正等覺)만이 반열반(般涅槃)을 얻을 수 있어 일체의 온갖 공덕을 이룩한 때문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일체의 온갖 공덕을 이룩하지 못했지만 열반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 이것은 곧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부처님에게만 열반을 얻음이 있사오니 한량없는 공덕을 이룩한 까닭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정도의 공덕을 이룩하였지만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 것, 이것은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음이 있으니 그것은 불가사의한 공덕을 이룩한 때문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정도의 공덕을 성취한 것인데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반열반을 얻을 수 있는 것이오니, 마땅히 끊어야 할 일체의 잘못을 끊어 버리고 가장 으뜸가는 청정(淸淨)을 이룩하신 때문이옵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아직도 허물이 남아 있으므로 가장 으뜸가는 청정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반열반을 얻을 수 있는 것이오니, 일체중생의 존경하는 바 되고 아라한과 벽지불, 그리고 보살의 경계로부터 초월한 때문입니다. 이 까닭에 아라한과 벽지불은 열반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과 사지(四智)의 구경을 관찰하고 소생하여 쉴 곳(蘇息處)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 이것 또한 부처님의 방편일 뿐 아직도 이치를 완전히 다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으니 그 두 가지란 분단사(分段死)와 부사의변역사(不思議變易死)가 그것입니다. 분단사란 허망한 중생을 이름이요, 부사의변역사란 아라한과 벽지불, 그리고 대력보살(大力菩薩) 등의 마음에 따라 태어나는, 몸으로부터 구경의 위 없는 보리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죽음 중에서, 분단사로써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를 '나의 태어남이 다했다' 합니다. 남음이 있는 과보를 증득함으로써 청정한 행위가 이미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범부인 인간세상의 사람과 천상의 사람으로는 이루지 못한 것이고, 일곱 종류의 학인들로서는 앞서서 끊지 못하였던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지을 것을 이미 이루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은 번뇌로도 다시 미래의 몸을 받지 않으므로 '미래의 몸을 받지 않는다'합니다. 그러나 일체의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고 또한 일체의 수생(受生)을 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아라한과 벽지불도 능히 끊지 못합니다.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지번뇌와 기번뇌가 그것입니다. 주지번뇌에는 또 네 가지 종류의 번뇌가 있습니다. 견일처주지 · 욕애주지 · 색애주지 · 유애주지가 그 네 가지입니다. 이 네 가지 주지번뇌가 일체의 기번뇌를 일으킵니다. 기번뇌는 찰나의 마음과 서로 찰나에 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마음에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은 시작이 없는 무명주지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네 가지 주지번뇌의 힘이 모든 상번뇌(上煩惱)의 의지할 곳이며 또한 종자입니다. 그러나 무명주지에 비하면 산수나 비유로 미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와같이 무명주지의 힘은 유애(有愛)와 사주지(四住地)의 힘보다 매우 큽니다. 비유하면 마치 악마 파순이 타화자재천에서 그 빛깔과 힘과 생명과 권속과 여러 가지 도구가 가장 자재하고 뛰어나듯이, 이 무명주지의 힘은 저 네 가지 주지(住地)의 힘보다 가장 뛰어납니다.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수많은 상번뇌에 의지하는 바며, 또한 네 가지 종류의 번뇌가 오래 머물게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로는 끊을 수 없고, 오직 여래와 보리의 지혜로서만 끊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와같이 무명주지의 힘이 가장 큰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또 번뇌(取)의 연(緣)과 유루업의 인(因)으로 삼계(三界)를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이 무명주지의 연(緣)과 무루업의 인(因)이 아라한과 벽지불, 그리고 보살의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지위와 저 세 가지의 의생신, 그리고 무루업 등이 나타나는 것이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는 것이므로 연이 있는 것이고, 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세 가지 의생신과 무루업이 모두 무명주지에 인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유애주지 등 네 가지 주지는 무명주지와 함께 업(業)을 같이 하지 않습니다. 무명주지는 네 가지 주지를 여의는 것과는 달라, 부처님의 지위에서 끊는 것이며 또한 부처님의 보리 지혜로 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벽지불은 네 가지 종류의 주지는 끊었지만 무루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유자재한 힘은 역시 증득하지 못합니다. 무루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무명주지인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 그리고 최후신(最後身)인 보살에게는 무명주지의 구름이 덮여있는 까닭에 저 갖가지 법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깨닫지도 못합니다.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보지도 못하는 까닭에 마땅히 끊어 버려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구경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끊지 못하는 까닭에 허물이 남은 해탈(有餘過解脫)이라고 이름합니다. 일체의 모든 잘못을 여읜 해탈이 아니기에 청정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일체의 모든 청정이 아니기에 아직도 성취해야 할 공덕이 남아 있는 공덕이라고 이름하고 일체의 모든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룩해야 할 해탈이 남아 있는 해탈과 밝혀야 할 청정이 남아 있는 청정, 그리고 이룩해야 할 공덕이 남아 있는 공덕인 까닭에 남음이 있는 고통을 알고 남음이 있는 집(集)을 끊고, 남음이 있는 멸(滅)을 증득하고, 남음이 있는 도(道)를 닦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소분열반을 얻는다고 합니다. 소분(少分)의 열반을 얻는 것을 열반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이름합니다."

 

만약 일체의 고(苦)를 알고, 일체의 집(集)을 끊고, 일체의 멸(滅)을 증득하고, 일체의 도(道)를 닦는다면 무상(無常)하게 파괴되는 세간과 무상하게 병든 세간에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열반(常住涅槃)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보호해 줄 사람 없는 세간과 의지할 바 없는 세간에서 보호해 주는 사람이 되고 의지할 곳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法)은 우열이 없는 까닭에 열반을 얻고, 지혜가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고, 맑고 깨끗함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까닭에 열반의 맛은 한맛(一味)이며 평등한 맛(等味)이니 지혜와 해탈의 맛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무명주지를 끊지 못한 사람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지혜와 해탈의 맛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명주지를 끊지 못한 사람은 끊어야 할 항하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수의 얻을 것을 얻지 못하였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무명주지가 쌓여 일체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번뇌와 상번뇌를 일으킵니다. 저 심상번뇌, 지상번뇌, 관상번뇌, 선상번뇌, 정수상번뇌, 방편상번뇌, 지상번뇌, 과상번뇌, 득상번뇌, 역상번뇌, 무외상(無畏上) 번뇌 등을 일으킵니다. 이와같이 항하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상번뇌는 여래의 보리지로서만이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무명주지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상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무명주지로 인한 것이며 무명주지에 반연한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에 일으킨 번뇌는 찰나의 마음이 서로 찰나에 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은 시작이 없는 무명주지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보리지혜로 끊을 수 있는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법은 일체의 모든 것이 무명주지로 유지되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치 일체의 온갖 종자가 모두 땅을 의지하여 나고 서며 그리고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땅이 파괴된다면 저 종자들도 역시 따라서 없어질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의 보리지혜만으로 끊을 수 있는 항하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법은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생겨나고 서며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 무명주지가 끊어진다면 부처님의 보리지혜로 끊을 수 있는 항하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법도 모두 이를 따라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체의 온갖 번뇌와 상번뇌가 끊어지면 부처님께서 얻은 항하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일체의 법에 통달함과, 일체의 지견에 구애됨이 없는 것과, 일체의 모든 잘못으로부터 벗어남과, 일체의 모든 공덕을 얻어 법왕이신 법주께서 자유자재로움을 얻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에 자재한 지위에 오른 여래·응·등정각은 '내가 태어나는 일은 이미 끝났고, 범행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지을 일은 이미 다 지었고, 미래에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고 올바른 사자후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은 사자후로써 올바른 이치에 의지하여 수기(受記)를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이시여, 후세에 몸을 받지 않는 지혜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래께서 위없는 방법으로 사마를 항복받고 일체의 세간으로부터 초월하여 일체의 모든 중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불가사의한 법신을 얻어 일체의 지혜를 낼 만한 경계에서 어떠한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자재를 얻습니다. 더 이상 지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는 지위에서 십력이 용맹하여 더 높은 것이 없고, 두려울 것 없는 가장 훌륭한 지위에 올라 일체의 지혜를 낼 만한 경계를 구애됨 없이 관찰하지만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후세에 몸을 받지 않는 지혜로써 사자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태어나고 죽는 두려움을 벗어나 차례로 해탈의 즐거움을 얻고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생사의 공포로부터 떠났으므로 생사의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후세에 몸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은 제일의 소생할 곳인 열반의 경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들이 먼저 얻은 경지에서 법에 어리석지 않으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 유여지(有餘地)를 얻을 줄 알며,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이 모두 대승에 들어가는 때문입니다. 대승은 곧 불승(佛乘)입니다. 이 까닭에 삼승(三乘)은 곧 일승(一乘)입니다. 일승을 얻은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열반의 세계입니다. 열반의 세계는 곧 여래의 법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구경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곧 구경일승이니, 여래와 다름이 없고, 법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여래는 곧 법신입니다. 구경법신이란 곧 구경일승(究竟一乘)입니다. 구경(究竟)이란 곧 가이없고 끊어짐이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는 끝없는 시간에 머물고 여래·응·등정각은 미래와 나란히 머물기에, 여래는 한계(限界)가 없습니다. 크나큰 자비 또한 한계가 없어 세상을 편안히 위로합니다. 한량없는 대비로 한계가 없는 세상을 위로합니다. 이와같이 말하는 사람은 여래를 잘 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만약 다시 말하기를 한량없는 법과 항상 머무는 법이 일체 모든 세간의 귀의할 곳이 된다고 한다면, 이 또한 여래를 옳게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 까닭에 아직 제도되지 못한 세간과 귀의함이 없는 세간에서 끝없는 미래와 끝없는 귀의와 항상 머무는 귀의가 되는 사람은 여래·응·등정각을 말함입니다.

 

법이란 곧 일승의 도를 설하는 것입니다. 승(僧)이라고 하는 것은 삼승(三乘)의 무리입니다. 이 두 가지 귀의는 구경의 귀의가 아니므로 이름하여 부분적인 귀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승의 도를 설하는 법은 구경의 법신을 얻는 것입니다. 그 위에 다시 일승의 법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삼승의 무리는 공포가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여, 초월하기를 구하고 수학(修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 귀의는 구경의 귀의가 아니고 한계가 있는 귀의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로부터 조복(調伏)을 받고 여래에게 귀의하여 불법(佛法)을 택한 즐거움을 얻고, 믿는 마음을 내어 법(法)과 승(僧)에 귀의한다면, 이 두 가지에 귀의하는 것은 두 가지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곧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 됩니다.

 

제일의(第一義)에 귀의하는 것은 곧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귀의와 제일의는 결국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와 두 가지 귀의는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곧 삼귀의(三歸依)입니다. 왜냐하면, 일승도(一乘道)를 설함은 여래께서 사무외를 성취하여 사자후로 설하는 것인 때문입니다.

 

만약 여래가 저들의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써 설한다면 그것은 곧 대승입니다. 삼승이 없습니다. 삼승은 일승에 들어갑니다. 일승이란 곧 제일의승(第一義乘)입니다.

 

제6장 무변성제장(無邊聖章)

"부처님이시여, 성문과 연각은 처음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하고, 하나의 지혜로 모든 주지(住地)를 끊습니다. 하나의 지혜로 사단지(四斷知)와 공덕작증(功德作證)을 알고 또한 이 네 가지 진리의 뜻을 압니다.

 

부처님이시여, 출세간의 상상지(上上智)와 네 가지 지혜가 점점 나아가는 것과 네 가지 인연(四緣)이 점점 나아가는 것 등은 없습니다. 점지법(漸至法), 즉 점점 나아지는 법이 곧 출세간의 상상지입니다.

 

부처님이시여, 금강의 비유는 제일의(第一義) 지혜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성문과 연각의 무명주지를 끊지 못한 처음의 사성제(四聖)의 지혜는 제일의지(第一義智)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둘이 없는 성제지(聖智)로써 모든 주지를 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응·정등각은 일체의 모든 성문과 연각의 경계가 아닙니다. 불가사의한 공지(空智)로써 일체의 온갖 번뇌장(煩惱藏)을 끊는 것입니다. 만약 일체의 모든 번뇌장을 부서버린다면, 구경의 지혜에 이르고 이것을 제일의지(第一義智)라고 이름합니다. 처음으로 안 성제지(聖諦智)가 구경의 지혜는 아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향하는 지혜일 뿐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성(聖)의 의미는 일체의 온갖 성문과 연각은 아닙니다. 성문과 연각은 한계가 있는 공덕을 성취하고 성문과 연각은 부분적인 공덕을 성취한 까닭에 이름하기를 성(聖)이라고 합니다. 성스러운 진리(聖)라고 하는 것은 성문과 연각은 진리가 아니며 또한 성문과 연각의 공덕이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진리는 여래·응·정등각이 처음으로 깨달아 알고 그런 다음, 무명의 먹구름에 가려져 있는 세간을 위하여 열어 보여 주고 연설한 까닭에 성스러운 진리(眞理)라고 합니다.

 

제7장 여래장장(如來藏章)

"성스러운 진리 즉, 성제(聖諦)란 매우 깊은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매우 미세(微細)하여 알기 어렵습니다.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세간에서는 믿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깊고도 깊은 여래장을 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의 경계이고, 일체의 모든 성문과 연각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여래장의 자리에서 성스러운 진리의 이치를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의 자리가 매우 깊고 깊기 때문에 설하는 바 성스러운 진리 또한 매우 깊습니다. 미세하여 알기 어렵고 머리 속의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일체의 모든 세간 사람들은 능히 믿지도 못합니다."

 

제8장 법신장(法身章)

"민약 헤아릴 수 없는 번뇌장(煩惱藏)에 얽매인 여래장(如來藏)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그 한량없는 번뇌장을 초월한 법신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이 없습니다. 여래장과 여래법신(如來法身)이 생각하거나 논의할 수 없는 부처님의 경계와 설한 방편에 대하여 결정된 마음을 얻은 사람은 성스러운 두 가지 진리(二聖)의 이치를 믿고 이해할 것입니다.

 

이처럼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성스러운 진리의 두 가지 뜻을 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성제의 두 가지 뜻을 설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작성제(作聖)의 뜻을 설한 것과 무작성제(無作聖)의 뜻을 설한 것 두 가지입니다.

 

작성제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사성제(有量四聖)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으로 인해 능히 일체의 고통(苦)을 알고, 받는 바 일체의 온갖 집(集)을 끊으며, 받는 바 일체의 온갖 멸(滅)을 깨닫고, 받는 바 일체의 온갖 멸도(滅道)를 닦는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팔성제(八聖)는 여래가 설한 사성제(四聖)와 같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네 가지의 작위(作爲)가 없는 온전한 진리의 이치는 오직 여래·응·정등각만이 성취하는 것이고 아라한과 벽지불에 있어서는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下)·중(中)·상(上)의 법(法)으로는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여래·응·정등각만께서 작위가 없는 네 가지 온전한 진리의 뜻에 있어서 일이 궁극적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여래·응·정등각은 미래의 일체의 고를 알고, 일체의 번뇌와 상번뇌가 거두어들인 일체의 집을 끊고, 일체의 의생신(意生身)의 오음을 멸하고, 일체의 고통이 멸한 깨달음을 얻은 때문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파괴함으로 해서 고통이 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소멸한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 없고, 작위(作爲)가 없고, 생겨남이 없는 것입니다. 다함이 없고, 궁극을 떠났으며, 항상 머무는 것입니다. 자성청정(自性淸淨)은 일체의 번뇌장(煩惱藏)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항하의 모래알보다도 많은 불리(不離)·불탈(不脫)·불이(佛異)·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성취함을 여래의 법신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와같이 여래법신(如來法身)은 번뇌장(煩惱藏)을 떠나지 않은 여래장(如來藏)이라고 이름합니다.

 

제9장 공의은복진실장(空義隱覆眞實章)

"부처님이시여, 여래장지(如來藏智)는 여래공지(如來空智)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이란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 그리고 큰 힘을 가진 보살들이 본래부터 볼 수 있는 것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두 가지의 여래장공지(如來藏空智)가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공여래장(空如來藏)은 일체의 번뇌장을 여의었거나 벗어난 것이지 번뇌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은 항하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그리고 부사의한 불법(佛法)으로부터 여의었거나, 떠난 것이 아니며 또한 불법과 다른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두 가지 공지(空智)는 모든 대성문(大聲聞)들이 능히 여래를 믿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공지는 네 가지 뒤바뀌지 않은 경계에서 구릅니다. 이 때문에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은 본래부터 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얻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고통이 소멸되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아 얻습니다. 일체의 온갖 번뇌장을 파괴하고, 일체의 모든 고통을 소멸하는 도를 닦는 것입니다.

 

제10장 일제장(一章)

"부처님이시여, 이 사성제에 있어서 세 가지는 항상됨이 없는 것(無常)이며 하나는 항상됨이 있는 것(常)입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진리(三諦)는 유위(有爲)의 상(相)에 들어감이 있는 것인데, 유위의 상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무상(無常)이고, 무상은 곧 헛된 법이며, 허망한 법은 진리가 아니고, 항상 변함없는 것이 아니며 귀의할 바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고제(苦諦)·집제(集諦)·도제(道諦)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아니고 항상 변함없는 것이 못되며 귀의할 바가 아닙니다.

 

제11장 일의장(一依章)

"고통을 멸하는 하나의 진실한 도리는 유위(有爲)의 상(相)을 여의는 것입니다. 유위의 상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은 곧 상(常)입니다. 변함이 없이 항상한다는 것(常)은 헛된 법이 아닙니다. 헛된 법(虛妄法)이 아닌 것은 진실한 도리(諦)이며 항상하는 것이며, 귀의할 바입니다. 이 때문에 멸제(滅)는 제일의(第一義)입니다."

 

제12장 전도진실장(顚道眞實章)

"부사의(不思議)한 이 멸제는 일체 모든 중생의 심식에 인연하는 바를 떠난 것입니다. 또한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경계가 아닙니다. 마치 눈이 어두운 사람이 여러 가지의 빛깔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태어난 지 7일밖에 안된 어린 아이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고멸제(苦滅) 또한 이와 같아, 일체의 모든 범부의 심식에 인연하는 바가 아니며, 또한 성문과 연각 이승(二乘)의 경계가 아닙니다.

 

범부의 인식은 뒤바뀐 두 가지 견해입니다. 일체의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는 곧 맑고 깨끗합니다. 극단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견해, 즉 변견이란 범부가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陰)에 있어서 일으키는 나라고 하는 견해에 집착함으로 생겨나는 두 가지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것을 변견(邊見)이라고 이름하는데 소위 상견과 단견이 그것입니다.

 

제행은 무상하다고 보는 견해는 단견으로서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열반은 변함이 없는 것(常)이라고 보는 견해는 상견(常見)으로써 올바른 견해가 못됩니다. 허망한 생각, 즉 잘못된 생각으로 보는 때문에 이와같은 견해를 짓는 것입니다.

 

몸의 모든 근에 대하여 분별하여 생각하기를 현재의 법이 파괴될 것을 보고, 계속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므로 단견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망상으로 인한 견해 때문입니다.

 

마음이 서로 계속함에 대해서는 어두워 이해하지 못하고, 찰나 사이의 의식의 경계를 알지 못하여 상견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망상으로 보는 탓입니다. 이렇게 망상으로 인한 견해는 저 진실한 뜻에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이상한 생각으로 분별하니 단(斷)이라 하거나 상(常)이라고 합니다.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는 중생들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오음이 무상(無常)한 것을 상(常)이라고 생각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아(無我)인 것을 아(我)라고 생각하며, 또한 깨끗하지 못한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깨끗한 경계와 여래법신(如來法身)은 본래부터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까닭에 변함이 없다는 생각(常想), 즐겁다는 생각(樂想), 내가 있다는 생각(我想), 깨끗하다는 생각(淨想) 등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결코 잘못된 견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법신(如來法身)은 상바라밀(常波羅蜜)이며, 낙바라밀(樂波羅蜜)이며, 아바라밀(我波羅蜜)이며, 정바라밀(淨波羅蜜)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이렇게 보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올바른 견해를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입을 따라 나고, 올바른 법을 따라 나고, 법을 따라 화생(化生)하여 진리의 보배를 얻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맑고 깨끗한 지혜란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바라밀입니다. 이 맑고 깨끗한 지혜를 저 멸제에 있어서는 경계가 아닌데도 누가 깨끗한 지혜(淨智)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물며 사의지(四依智)라고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삼승(三乘)의 초업(初業)은 법에 어리석지 않고, 그 이치를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얻는 까닭입니다. 그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사의지를 설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사의지는 세간의 법입니다.

 

부처님이시여, 하나에 귀의하는 것은 일체에 의지하는 것이며, 출세간(出世間)의 으뜸 중에서도 으뜸이니 제일 가는 귀의를 소위 멸제(滅)라고 합니다."

 

제13장 자성청정장(自性淸淨章)

'부처님이시여, 생사(生死)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본제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장이 있으므로 생사의 세계에서 윤회한다고 설하는데 이것은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태어난다·죽는다 하는 생사(生死)란 모든 수근(受根)이 없어지고 이어서 수근(受根)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생사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이시여, 죽는다·태어난다고 하는 이 두 법(法)은 여래장입니다. 세간의 말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근(根)이 무너지는 것이며,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모든 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래장(如來藏)에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래장이란 것은 유위(有爲)의 상(相)을 떠나 있고, 또한 여래장은 상주불변(常住不變)합니다. 이런 까닭에 여래장은 귀의할 곳이며, 간직하는 것이며, 세우고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떠나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다른 것이 아닌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불법(佛法)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고, 달라지는 유위법(有爲法)의 귀의처가 되고 거두어 지니고 세워 일으키는 것이 곧 여래장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즐거이 구하는 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육식과 심법(心法)의 지혜에 있어서, 이 칠법(七法)은 찰나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갖가지의 고통과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장이란 과거(前際)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법이 아닙니다. 모든 고통의 씨를 뿌리고, 또한 그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할 수 있게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장은 내가 아니고, 중생이 아니며, 생명도 아니고, 인간도 아닙니다. 여래장이란 몸이 있다고 하는 견해에 떨어진 중생과 뒤바뀐 생각을 하는 중생, 그리고 공(空)으로 그 뜻이 산란한 중생들의 경계가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장이란 법계장(法界藏)이며 법신장(法身藏)이며,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이며, 자성청정장(自性淸淨藏)입니다. 이처럼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여래장이 객진번뇌와 상번뇌(上煩惱)에 물드는 것은 불가사의한 여래의 경계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의 착한 마음은 번뇌에 물들지 않고, 또한 찰나의 나쁜 마음도 번뇌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마음에 접촉하지 않고, 마음도 또한 번뇌에 접촉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접촉하지 않는 법이 능히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번뇌도 있고, 번뇌가 마음을 물들이는 일도 있습니다. 자성청정심에 물드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참다운 눈과 진실한 지혜로 법의 근본이 되었으니, 법에 통달하시고, 올바른 진리에 귀의하여 진실하게 알며 보는 것입니다."

 

승만부인이 이처럼 알기 어려운 법을 부처님에게 말씀드리면서 물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그렇다, 그렇다. 자성청정심에 물드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 두 가지 법이 있으므로 알기 어렵다. 자성청정심은 진실로 알기 어렵고 또한 그 맑고 깨끗한 자성이 번뇌에 의해 물든다는 것은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같은 두 가지 법은 너와 큰 법을 성취한 보살마하살만이 능히 들을 수 있고 나머지 모든 성문들은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믿을 뿐이다."고 말씀하셨다.

 

제14장 진자장(眞子章)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만약 나의 제자로서 따라 믿고,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사람이라면 밝은 믿음을 의지하여 법의 지혜를 기꺼이 따르고 드디어 구경을 얻게 되느니라. 법의 지혜를 기꺼이 따른다고 하는 것은 갖추어진 근(根)과 의해(意解)와 경계(境界)를 관찰하여 업보(業報)를 관찰하며, 아라한(阿羅漢)의 무명(眼)을 관찰하며, 마음의 자재한 즐거움과 선정의 즐거움을 관찰하며, 아라한과 벽지불, 그리고 대력(大力)보살 등 성자재통(聖自在通)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이와같은 다섯 가지의 관찰을 성취하고 내 멸후의 미래세에 나의 제자가 따라 믿어 그 믿음이 깊어지고 밝은 믿음으로 법의 지혜를 기꺼이 따른다면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경을 얻게 될 것이니라. 이 구경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의 도에 들어가는 인(因)이다. 여래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와같이 크나큰 이익이 있어 깊고 깊은 이치를 비방하지 않을 것이니라."

 

이 때에 승만부인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다시 그 외에도 다른 큰 이익이 있습니다. 제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이 이치를 설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보아라."

 

승만부인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세 부류의 선남자, 선여인은 깊고 깊은 이치를 스스로 해치지 않고 큰 공덕을 나타내어 대승의 도에 들어갑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란, 혹은 선남자, 선여인이 스스로 깊고 깊은 법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고, 혹은 선남자, 선여인이 법의 지혜를 기꺼이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혹은 선남자, 선여인이 모든 깊고 깊은 법을 스스로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나의 경계가 아니고,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에게 미루는 것 등입니다. 이와같은 세 부류의 선남자, 선여인은 말할 바가 못됩니다.

 

제15장 승만장

승만부인이 계속해서 아뢰었다.

'모든 다른 중생들은 모든 깊고 깊은 법에 열심히 집착하거나, 망령된 말을 하거나, 바른 법을 등지고 모든 외도의 법을 익힙니다. 이처럼 씨알이 썩은 사람들은 국왕의 힘과 하늘과 용, 그리고 귀신의 힘으로써 항복받아야 합니다."

 

이 때에 승만부인은 모든 권속들과 더불어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예(禮)를 올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승만이여, 깊고 깊은 진리를 방편으로써 수호하고 옳지 못한 진리를 항복받음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너는 이미 백천억의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으므로 이와같은 이치를 능히 설하는 것이니라."

 

이 때 부처님께서 대광명을 발하시어 대중을 비추시면서 몸을 허공에 날려 7다라수(七多羅樹) 높이까지 올라가셔서, 허공 중에서 걸어 사위국으로 돌아가셨다.

 

이 때 승만부인은 모든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잠시도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이미 부처님께서 멀리 가셨을 때에 환희용약(歡喜踊躍)하면서 서로서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구족하게 부처님을 생각하였다.

 

성으로 돌아온 승만부인은 우칭왕에게 대승을 찬탄하였다. 그리고 성안에 살고있는 일곱 살 이상의 여자들을 대승으로 교화하였다. 우칭왕 또한 일곱 살 이상된 남자들을 모두 대승으로 교화하였다. 온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대승으로 향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祈園精舍)로 돌아와서 장로(長老) 아난에게 일러 주었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을 생각하셨다. 그 때 제석천왕은 모든 권속들과 함께 홀연히 부처님 앞에 이르렀다.

 

이 때 부처님께서 제석천왕과 장로 아난을 향해 이 경을 설하셨다. 경을 다 설하시고 난 뒤에 제석천왕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마땅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잘 외우라. 교시가여,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겁 동안에 보리행을 닦고, 육바라밀을 행하였느니라. 만약 또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듣고, 외우며 또 몸에 지닌다면 이 사람의 복이 앞사람에 비해 많을 것인데, 하물며 여러 사람에게 널리 설하는 공덕이야 어떠하겠느냐? 이 때문에 교시가여, 이 경을 읽고 외우며, 33천을 위하여 분별하여 널리 설하도록 하라."

 

그리고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시 일러 주셨다.

'그대도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사부대중을 위하여 널리 설하도록 하라."

 

이 때에 제석천왕이 부처님에게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고 이름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받들어 지니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제석천에게 말했다.

"이 경은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는 공덕을 성취한 것이니라. 일체의 모든 성문과 연각들은 이 경의 구경(究竟)을 관찰하거나 알거나 볼 수 없다. 교시가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한 공덕이 모인 것임을. 이제 마땅히 너를 위하여 그 이름을 간략하게 설할 것이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도록 하라."

 

이 때에 제석천왕과 장로 아난이 부처님을 향해 말씀드렸다.

"거룩하십니다. 부처님이시여, 오직 말씀하신대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은 여래의 진실한 제일의공덕(第一義功德)을 찬탄한 것이니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불가사의한 큰 수기라고 하는데,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일체의 모든 원(願)을 포섭하는 크나큰 원이라고 하는데,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불가사의한 섭수정법(攝受正法)을 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법신을 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공한 뜻이 진실을 가리운 것을 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하나의 진리(一)를 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받아 지녀라. 편안한 하나의 귀의에 상주(常住)함을 설한 것이니,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자성청정심이 가리워 있음을 설한 것이니,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여래의 진실한 제자에 대해 설한 것이니,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승만부인이 사자후를 설한 것이니, 이와같이 받아 지녀라.

 

또한 교시가여, 이 경에서 설한 것은 일체의 온갖 의심을 끊고 올바른 뜻을 결정하여 일승(一乘)의 도(道)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라.

 

교시가여, 지금 승만부인이 사자후한 이 경을 너에게 부촉하노라. 진리가 머물러 있을 때까지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널리 분별하여 설하도록 하라."

 

제석천왕이 부처님을 향해 말했다.

"거룩하십니다. 부처님이시여, 높은 가르치심을 받겠습니다."

 

이 때에 제석천왕과 장로 아난,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천상의 사람과 인간 세상의 사람과 아수라와 건달바 등이 부처님의 설하심을 듣고 기쁘게 받들어 행하였다.

 

 

출전 : 승만경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