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마음은 사대(四大)의 이 몸을 여의지 않았다. 만일 이 마음을 여의면 운동할 이도 없다.
이 몸은 앎(知)이 없어 초목이나 기왓쪽 같은지라 몸은 감정이 없거늘 어떻게 운동하리요?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분별하고 운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며 작용의 움직임이다. 움직임이란 마음의 움직임이요, 움직임 그대로가 작용이니 움직임과 작용 이외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면 마음이 아니요, 마음이라면 움직이지 않나니 움직임이란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마음을 여의지 않았고 마음은 움직임을 여의지 않았으나 마음에는 여읜다는 것도 여의었다는 것도 없으며, 마음에는 움직인다는 것도 움직였다는 것도 없다.
이는 마음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니, 마음 그대로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 그대로의 움직임과 물질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움직임도 아니요, 작용도 아니니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한지라 공(空)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작용이 다같이 마음이나 마음의 근본은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움직이되 움직이는 바가 없다.’
하니 종일토록 가고 오되 가고 온 적이 없고, 종일토록 보되 본 적이 없고, 종일토록 웃되 웃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듣되 들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알되 안 적이 없고, 종일토록 기뻐하되 기뻐한 적이 없고, 종일토록 다니되 다닌 적이 없고, 종일토록 멈추었으되 멈춘 적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말로써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따질 자리가 없어졌다’하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본래가 원적(圓寂)한지라 성나고 기쁘고 가렵고 아픔이 어찌 본래의 사람과 다르리요? 더욱 미루어 찾건대 아픔과 가려움을 찾을 수 없다.
경에 말하기를 ‘나쁜 업은 곧 괴로운 과보를 받고 착한 업은 곧 좋은 과보를 받는다’하시니 성내면 지옥에 빠지고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날 뿐 아니라 성냄과 기뻐함의 성품이 공(空)한 줄 알아서 집착하지만 않으면 곧 업력(業力)을 벗어난다.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경론을 강설하더라도 결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기에 간략히 옳고 그름을 이와 같이 표방하였으나 모두가 미치지 못하노라.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음, 마음 마음이라지만
찾을 길 없어라
퍼지면 법계에 두루하고
움츠리면 바늘 끝도 용납지 못한다.
나는 본래 마음을 찾을 뿐
부처를 구한 적 없나니
삼계(三界)의 모든 것 공(空)하여
아무 것도 없음을 분명히 하노라.
부처를 구하려거든
마음만을 구할지니
이 마음이란 마음 그대로가
마음 그대로의 부처로다.
내 본래 마음을 구하지만
마음은 스스로 가지고 있나니
마음을 구하려면
마음으로 알기를 바라지 말라.
부처의 성품이란
마음 밖에서 얻는 것 아니니
마음이 생길 때가
곧 죄가 생기는 때니라.
전법계(傳法偈)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중생을 건지려 함이니
한 송이 꽃에 다섯 잎 되어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리라.”
출전 : 선문촬요(달마혈맥론)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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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508)-뉴사전 (0) | 2020.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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